태그 : 대학
2010/04/05   우리가 주인이 되는 방법
2010/03/18   금메달과 대자보(수정)
우리가 주인이 되는 방법

  보궐선거를 앞두고 가장 시끄러웠던 문제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논쟁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뭔가 찝찝하다. 정체불명의 자유주의와 책임론이 등장한다. 질질 흐르는 콧물을 흡입하는 옆 짝꿍에게 손에 방귀를 모아 먹이던 시절부터 우리는 책임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가정 아래 권리의 행사는 자유라고 배웠다. 제 손으로 이명박을 뽑았든 투표권을 포기해서 학생회 없는 학교를 만들든, 분뇨의 향이 배어있을지언정 자기 손으로 집어넣은 투표용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면 가타부타 떠들어댈 이유가 없다. 책임질 각오가 되어있으니 찬성을 했거나 반대를 했거나 투표를 안 했겠지. 내 찝찝함의 이유는 그보다 중요한 점이 논쟁의 중심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투표를 하고 그에 책임을 지는 것, 정말 그것만으로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투표를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로 싸우는 것은 학내 민주주의와 관련한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고 정치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재확인한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대학에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엔 회의적인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말은 참 좋다. 집단의 구성원들이 주인 노릇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학교의 주인은 학교의 구성원인 학생이어야 맞다. 정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 감상적 당위로는 우리 손으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즉 실질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 학교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총장이나 이사장? 아깝지만 틀렸다. 정답은 바로 자본이다. 굳이 기업에 인수되지 않았더라도 이미 학교는 기업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지금 학교의 모습에서는 수익추구 이외의 어떤 목적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등록금을 둘러 싼 학교 측과 학생들 간의 갈등, 총학선거 참여율 저조, 학점 인플레, 배치표 문제, 로스쿨과 약학대 유치전 등 대학과 관계된 거의 모든 문제는 자본의 논리에 귀속된 현 세태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권리의 쓰임새와 책임, 절차적 민주주의 등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건 지금으로선 큰 의미가 없다. 원론에 부딪쳐 나아가질 못한다. 커다란 담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본이 대학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뜬금없게 들리겠지만 난 SAY를 아주 싫어한다. 그들에게선 도무지 학생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극복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영합주의에 순응해버린 학생대표에게선 조금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허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SAY가 아니라 SAY와 같은 성향의 학생회가 등장한 배경이다. SAY의 지지도는 학생들의 성향을 전적으로 보여준다.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현실의 반영인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왜 투표율은 과반수 넘기가 힘들고, 왜 학생회 후보군은 달랑 하나이고, 왜 그것마저 고작 SAY인가, 또 그 때문에 반대표가 당선의 힘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는 왜 발생하는가?

  혹자는 이 모든 게 대학생들의 정치적 무관심의 결과라 말한다. 그렇다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야기하는 문제들을 다시 차근차근 살펴보자. 일단 참여율 저조를 가져올 것이다. 그것은 다시 투표율 하락, 일방향성의 후보군, 더 나아가면 아예 학생회 공석이라는 상황을 불러온다. 이미 우리는 몇 번 그러한 경험을 한 바 있다. 요컨대, 정치 활동의 위축이다. 그럼 자연스레 학생들의 목소리엔 힘이 빠진다. 응집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 측의 힘은 강해진다. 정치적 문제의 해결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제기랄, 역시 투표 백날 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정치에 회의를 느낀다. 무감각해진다. 다시 참여율은 떨어진다. 무한반복. 아,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 악순환의 고리 뒤편에 자본이라는 거대한 권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자본이 학교를 잠식한 데에는 모종의 음모론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자본주의가 의식화되면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투표율이 저조한 이유는 우리 손으로 만드는 정치로 인해 무언가가 바뀔 거란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지향하는 바(자본주의적 논리로서의 성공)와 우리가 인식하는 문제의 근원이 모순된다는 사실에 그 원인이 있다. 이를테면, 등록금 문제가 그렇다. 등록금인상에 반대하여 학교 측을 적대시하는 학생은 많다. 하지만 학교 운영진과 이사회를 적으로 간주하면 우리에겐 고작 등록금 좀 깎아달라고 사정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학교의 목적이 수익추구가 되어버린 상황에 대해 고민해야 해결법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투표가 자유인지 자위인지 하는 논쟁이 소모적으로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든 현 체제를 문제 삼지 않는 한 우리가 학교의 주인이 되기란 불가능하다. 상황이 이러한데 ‘투표권의 포기는 더 큰 권리를 위한 작은 권리의 포기’나 ‘민주시민으로서의 자격’ 따위를 운운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우리만의 민주주의’를 실천한다고 해서 우리가 주인이 되는 건 아니란 소리다. 손가락으로 바다를 휘젓는다고 모래 밑에 게가 꿈쩍이나 할까. 그보다는 대학, 더 크게는 사회, 본질적으로는 우리 안에 의식화된 자본주의에 의문을 가질 때 답이 보인다. 촘스키가 말했듯이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건 자본이다. 우리가 진정한 우리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본 아래서 논의되는 민주주의란 공허할 뿐이다. @post-it

 

 

by 유민석 | 2010/04/05 23:43 | 잡소리 | 트랙백 | 덧글(0)
금메달과 대자보(수정)

‘고대 자퇴女’ 김예슬이 두려운 사람들 by 프레시안
나의 대자보+단상들+공연소식 by 박가분

위 두 개의 글이 가장 정리가 잘된 느낌이다. 이 밑에 있는 건 좀 후졌지만 뭐 그러려니.

....하려고 했는데 너무 후져서 수정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지난 3월 10일, 고려대 정경대학 한 귀퉁이에 붙은 대자보가 세상에 작지만 분명한 여파를 불러왔다. 영문과에 재학중인 복학생 유 모씨가 전공, 토익과 개싸움을 벌이던 와중이었다. 옆 동네 학교에 다니던 한 여학생이 ‘뭐 같아서 못해먹겠다’며 배부른 돼지들이 쌓아올린 상아탑의 심장에 소크라테스적인 비수를 꽂아버렸다. “배고파도 인간으로 살어리랏다.” 불순하기 짝이 없는 휴머니즘 선언이었다.

  작은 소란의 원인은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의 자발적 퇴교 선언문이었다. ‘결국 이런 날이 왔구나.’라고, 난 노가리를 우물거리며 중얼댈 뿐이었다. 몇 년 전, 다이나믹 듀오는 노래했다. “미친 세상에 정상인 것조차 이상해.” 아직까지 가사가 마음에 닿는 걸 보니 가히 명곡이다. 아니면 세상이 변한 게 없거나. 제 모습이 무엇인지도 분간할 수 없을만큼 뒤틀린 이 나라와 대학의 현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한 현실에 반대하는 일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뒤틀린 결 사이로 튕겨 나오는 불순물(?) 하나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소신있는 결정을 응원하는 글부터 나처럼 행동보단 말뿐인 사람을 비난하는 목소리, 이 나라의 현실을 저주하는 외침 등 각양각색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허나 이런 불순한(?) 이슈엔 언제나 날 서린 눈초리도 있는 법이다. 현실을 모른다는 둥, 운동권 스펙 쌓으려는 빨갱이라는 둥, 다른 학생의 선택을 폄하하는 것이라는 둥 비난 또한 만만치 않다. 이는 ‘꼰대스러운’ 훈장질 아니면 근거없는 음모론 그것도 아니면 그냥 열폭,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다른 건 무시하더라도 현실인식 투철한 듯 보이는 반응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 놈의 훈장질, 나도 한 번 해보자. 현실이 어쨌다고?

  박제가 되어버린 슬픈 짐승, 아니지. 꼰대가 되어버린 슬픈 20대를 아시는가? 우리는 지금껏 패배하는 법을 배워왔다. 처음에는 열심히 공부하면 훌륭한 사람된다고 하던 어른들이 언제부턴가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며 공부나 하란다. 과연 살아보니 그렇다. 현실, 그거 만만치 않더라. 그리고 우리는 ‘꿈과 현실의 괴리’라는 거대한 물음표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현실을 선택했다. 그렇게 우리는 졌다. 180cm이하가 아니라 180m이상이라 한들 루저일 뿐이었다. 걔 중엔 물론 위너도 있었다. 그들은 국가고시에 합격하거나 인터넷 창업으로 성공한, 말하자면 20대의 ‘좋은 예’였다. 허나 꿈같은 이야기였다. 대통령이 되겠다던 꿈만큼이나 멀어보였다. 우리에게 보다 가까운 승리자들은 각종 스펙을 바탕으로 이름 높은 기업에 들어간 이들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정답이다. 그렇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 현실이다.” 정답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는 진 셈이다. 우리의 패배의식은 그렇게 심어졌다. 이제는 친구에게 또 후배에게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한다. “현실은 낭만적이지 않아.” 그렇게 경멸은 대물림된다.

  이 과정에서 원인은 사라지고 말았다. 현실에 맞추길 강요하는 원칙주의만이 남았다. 대기업에만 취직하려 하니까 취업을 못한다는 말이 등장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무소유의 미덕이란 얼마나 숭고한가? 하지만 모든 이가 해탈에 이를 수는 없을뿐더러 모든 이에게 강요할 수도 없다. 적어도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한,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 경제력에는 적정선이 있다. 문제는 저 ‘정답’에서 벗어났을 때 그 ‘적정선’에 닿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개개인의 차원에서 다뤄질 문제가 아니다. 공무원이 되거나, 창업에 성공하거나 또는 대기업에 취직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두려움을 갖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때문에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로 취업난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정당하지 않다. 순서가 틀렸다. 무엇보다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적어도 취직에 있어 인간의 탐욕에 대한 윤리적 성토는 그 후에 이루어져야 한다. 적어도 지금은 무소유를 주장할 때가 아니다.

  한국의 대학은 이런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대학을 입학하면서부터 우리가 추구해야할 목표는 이미 정해져있다. 3.5이상의 학점과 토익, 토플점수, 6개월에서 1년에 걸친 어학연수나 교환학생 경험, 몇 가지의 자격증, 봉사활동 이력, 인턴경력 등이다. 여기에 조금 편한 사회생활을 위한 인맥뚫기도 포함된다. 선언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자발적으로 퇴학’한 것이 아니라 ‘대학을 거부’했다. 학문으로부터 벗어난 게 아니라 학교로부터 벗어났다. 정확히는 배움으로 포장된 스펙쌓기 대열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배움은 지금의 대학 안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대학교육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경험상 소위 말하는 ‘취업 양성소’를 노골적으로 표방하는 학과나 과목은 없었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배움의 목적이 학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수들이 개강 첫 날 수업계획을 전달하면서 한숨 섞인 말투로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학점 이야기 나오니까 눈빛이 바뀌는구만.” 이 말은 얼마나 학점을 쉽게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가 수강과목을 선택하는데 있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학점을 잘 받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대학에서 반드시 정치, 사회적 문제의식을 형성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갖춰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저런 천편일률적인 스펙에 목을 걸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어버렸을 때 누구 말마따나 대학은 하청업체가 된다. 지금 대학에서의 배움은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전제되지 못했다. 우리 모가지를 옥죄는 족쇄도 역시 사회구조에 그 뿌리가 있다.

  학교가 기업의 하청업체라는 말을 단순한 수요-공급의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조금 더 큰 틀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극단적으로 비틀어 말하면 학교는 기업을 위한 미래의 노동력을 제조하고 판매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기업이 원하는 노동력을 갖도록 도와준다. 그 대가로 돈을 번다. 그 돈은 물론 학생들의 등록금이다. 이상하다. 기업이 학교의 ‘고객’이라면 돈은 기업이 지불해야 한다. 왜 학생들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가? 왜 학생들은 취직 후 노동자가 되어 자신들의 노동력을 팔아 번 돈으로 주머니의 빈자리를 채워 나가야 하는가? 기업을 위한 노동자 육성이 대학의 과제라면 등록금은 기업이 부담해야 한다. 노동자의 경제활동이 국가경제를 위한 것이라면 국가가 부담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등록금을 내는 건 대학생들이다. 현재 대학생들의 노동력과 자본이 미래 자신들의 노동을 위해 쓰이는 것이다. 당혹스러운 비효율성이 아닐 수 없다. 표면적으로는 학생이 대학을 거쳐 기업에 들어가는, 서로가 윈-윈-윈 인 관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대학과 기업 두 개체의 연결고리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최종 결과는 사회가 명명한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학생들의 객체화다. 이 삼각관계 아래에서 학생들이 얻는 건 아무것도 없다. 빈 주머니를 메우기 전까지는 노동자는 노동력의 대가를 기대할 수 없다. 과거에 상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대학생들은 학생일 땐 돈을 지불해야 하고 취직을 하고 나선 노동력을 온전히 바쳐야 한다. 잃고 또 잃을 뿐이다. 착취하는 사람은 없는데 착취당하는 사람은 있다. 해괴한 일이다. 이것이 우리가 놓여있는 현실의 정체다.

  김예슬의 퇴교선언은 이런 부조리를 향한 사자후다. 그녀는 지옥에서 온 빨갱이같은 게 아니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대학생이었을 뿐이다.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것, 사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았나? 한번이라도 대학을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나? 앞서 말했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풍선이 불만과 불안으로 부풀대로 부풀었는데 안 터지는 게 이상한 거다. 그녀는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처음으로 풍선에 구멍을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약 한 달 전, 며칠이나마 우리를 행복하게 했던 김연아를 떠올려보자. 공교롭게도 김연아와 김예슬은 둘 다 이명박의 후배이자 (역겨운 광고카피를 빌리자면) 고려대의 딸이다. 그리고 한 명은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여동생 혹은 피겨여신이고, 한 명은 이제 20대 중반 고졸 여성이다. 한 명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다른 한 명은 학교 벽에 대자보를 붙였다. 이명박과 고려대가 김예슬을 자랑스러워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같은 고민을 안고 사는 우리에게 그녀의 행동은 김연아의 피겨 연기보다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김예슬에겐 ‘고려대 자퇴생’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닐 것이고 일각에선 ‘의식있는 시민’이라 불리며 허울뿐인 명예도 얻을 수 있을테다. 허나 의식있는 명문대 자퇴생이라는 칭호가 주어진다한들 우리가 이 대학이라는 주류의 틀로부터 이탈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기에 우리는 불편하다. 김연아는 3일 동안의 행복을 주었지만 김예슬은 앞으로 남은 대학생활 내내 느끼게 될 불편함을 주었다. 그 불편함이 우리에게 김연아가 주었던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 믿는다. 그렇기에 찢기고 오물로 더럽혀진 김예슬의 대자보 김연아의 금메달보다 더욱 빛난다. /끝





by 유민석 | 2010/03/18 21:58 | 잡소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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