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열 정거장을 지나는 내내 예뻤다.

확률
무엇이든 집단 속에 1/n의 확률로 분포되어 있는 것은 표본이 많으면 많을수록 취할 확률이 높다. 채굴된 광물이 크면 클수록 보석이 들어있을 확률이 높고 사냥을 오래, 많이 할수록 희귀한 아이템을 얻을 확률이 높다. 표본의 수와 특정 개체의 수가 비례한다는 확률의 법칙은 지하철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와 마주칠 가능성 역시 비껴가지 않는다. 유독 지하철에서 이상형을 봤다는 이야기가 많은 건 그 때문이다. 허구한 날 지하철만 타고 다니니까. 차가 있다면? 글쎄. 

인연
우리는 인연을 믿는다. 적어도 믿은 적이 있다. “같은 나라,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지하철에서, 하필 오늘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우리가 함께 있다니!”와 같은, 온갖 우연의 연쇄에 경이로움을 느꼈던 건 분명 철 지난 사랑놀음이 만든 오류다. 더러 생은 낭만적이어야 한다. 내가 주인공이기 위해서는 드라마틱한 서사를 씌워야 직성이 풀린다.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나만의 것이다. 이 때 순간의 우연성은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영역에 들어선다. 순간은 영원히 아름답다. 파우스트는 외칠 수밖에 없었다. “순간을 향하여 말하노니,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그 대가로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의 영혼을 가졌다. 맞은 편에 앉은 여자와 눈을 맞출 때의 설익은 마주침조차도 그렇다. 그것은 인연이 2년 뒤에 ‘이 년’이 될 때까지 적당히 유효하다. 인연은 그런 것이다.

상상
인간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알려진 동물답게 꽤 위험하다. 다행히 우리의 초자아는 만인의 투쟁과 지옥의 구현으로부터 세상을 수호한다. 상상은 법정에 설 일이 없다. 덕분에 인간은 상상 속 윤간에 대해 무죄를 입증할 책임에서 자유롭다. <사랑과 전쟁>이 머릿속에 심어놓은 빤한 레퍼토리는 상상이 충족시킬 수 있는 욕망의 총체다. 음험한 자극은 불륜 판타지로까지 나아간다. 그렇더라도, 두 번째 손가락의 반지와 감색 머플러, 짙은 눈썹과 깊어지기 시작한 팔자주름으로 기억될 여자가 술과 섹스로 점철된 망상 속에서 열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헐벗은 채 남아있더라도 나는 무사히 현실에 당도한다. 아랫입술을 깨문 음탕함에 도착적 증세를 보이는 나와 파국으로 치닫는 관계에 현실의 윤리가 간섭할 틈은 없다.

착각
상상이 이상적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면 착각은 그 반대편의 이름이다. ‘상상’의 몽환적으로 울리는 울림소리와 달리 ‘ㄱ’으로 끝나는 발음까지도 날선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착각은 좌절과 희망의 가능성을 동시에 내포하지만 대개는 좌절, 나아가 절망으로 우리를 이끈다. 착각은 상상과 현실의 소실점에 있다. 착각은 상상이 소멸함으로써, 그러니까 지하철 문이 열리는 소리가 현실을 환기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렇다면 착각은 그저 상상의 사후적 평가가 좌절로 결론지어진 것이다. 결론이 났으면 이제 내릴 때가 됐다. 현실과 상상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만큼 간격이 넓으니 내리고 타실 때 주의해야 한다.

현실
홍대입구에서 집에 가는 지하철을 탔다. 당산에서 구석 자리가 비었다. 조금 뒤 맞은 편에 서른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앉았다. 눈이 마주쳤다. 서로 괜히 고개를 돌리다 ‘눈길이 스치는 길목에 당신이 있을 뿐’이라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외면하기를 반복했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는 파마기가 풀려 아무렇게나 늘어졌다. 정면은 단단한 인상이었으나 옆얼굴은 새침하게 귀여웠다. 끊임없이 전화기를 만졌다.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있었다. 남편이 있을까 궁금했다. 물어보고 싶었다. 없다면 저녁을 같이 먹고 싶었다. 사실, 있었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입을 떼는 대신 발끝과 무릎과 무릎 위의 가방과 가슴과 턱, 입술, , 이마를 보았다. 여자는 열 정거장을 지나는 내내 예뻤다.

by 유민석 | 2012/01/09 06:09 | 잡소리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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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재이 at 2012/01/11 13:50
어쩜 제목이 저렇게 마음에 들 수가.
Commented by 유민석 at 2012/01/12 10:37
지금 생각해보니 약간 분위기가 이민정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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