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in the Metro

  어느덧 여섯 번째 학기가 끝나가지만 학교 가는 길은 도무지 낭만적이지가 않다. 애써 감상적인 의미를 찾아보려 해도 사람들로 가득 찬 객차는 답답하고 불쾌하기만 하다. 출근 시간 방배역에서 열차의 문이 열리면 내리는 사람도 없는데 사람이 밀려 나온다. 스펀지를 구겨서 상자에 넣으면 점점 부풀어 올라 상자를 비집고 나오듯이, 오전 8시의 지하철이 꼭 그렇다. 어느 변비약 광고가 떠오른다. 문득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똥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워의 지하철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령이 필요하다. 일단 열차를 기다리는 줄의 중간쯤에 선다. 맨 앞도 괜찮다. 꼴찌만 아니면 된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열차를 이용하실 승객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시면 된다.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열차의 문이 열리면 내려야 하는 세 사람을 위해 여섯 명이 따라 내린다. 승강장에 서있는 사람들과 길을 트기 위해 따라 내린 사람들이 얼마간 섞인다. 줄이 흐트러지면 따라 내린 사람 뒤에 바짝 붙는다. 이 사람들은 사람이 아무리 많더라도 열차에 타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 올라탄 열차인데! 그들이 올라타면 문 바로 앞까지 밀려나온 구두들 사이에 발을 슬며시 집어넣을 수 있다. 사람들이 움직이면서 기존의 배치가 흐트러져 한 두 사람 쯤 더 들어갈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진다. 바늘구멍에 몸을 짓이겨 넣고 문이 닫힐 때 머리나 신발이 끼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문틀을 밀면서 버틴다. 여기까지만 하면 성공이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긴장을 푼다. 오늘 지각은 안 하겠다. 대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덜컹거리는 리듬에 맞춰 그저 똥처럼 흘러가면 된다. 

  메시지가 왔다고 울어대는 옆 사람 주머니 속의 핸드폰 진동을 느끼지 않아도 될 즈음, 숨을 몰아쉬어도 눈치가 안 보일 즈음이면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사람이 안 보인다.) 다양한 군상을 마주한다. 나는 차창에 비춰진 객차 안을 둘러보곤 한다. 누군가가 신문을 읽다 짐칸에 올려두면 다음 역에서 탄 사람이 그 신문을 가져다 읽는다. 연재만화와 오늘의 운세를 보고 스도쿠 퍼즐을 찢은 다음 다시 올려둔다. 반으로 접힌 신문 뒤로 <혹시 당신의 양심을 두고 내리지는 않았습니까?>라는 공익광고가 보인다. 곧 이어 신문은 낡은 캡을 머리에 얹은 할아버지가 끌고 온 커다란 포대자루에 담긴다.

  20년 넘게 지하철을 타다보니 지하철 안에서 무료함을 달래는 나름의 방법도 터득했다. 지하철에서 시간 보내기 가장 좋은 방법은 독서지만 내가 주로 하는 것은 사람구경이다. 그런데 지하철에서는 함부로 시선을 둘 수가 없다. 자칫하면 강렬한 풀스윙 귀싸대기에 뱃살에 밀려 뜯긴 단추 마냥 날아가는 안경을 보게 되는 수가 있다. 그래서 주로 시선이 머무는 곳은 신발이다. 문가에 기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신발을 훑어본다. 신발을 보면 적어도 그 신발의 주인이 옷차림을 대하는 태도나 철학을 파악할 수 있다. 사실, 파악이라기보다는 상상에 더 가깝다. 이를 테면 코끝이 하얗게 갈라진 검은색 구두를 신은 직장인을 보고 입사할 때 그저 직장에 걸맞은 격식을 갖추기 위해 무난한 디자인, 적당한 가격이라는 기준에 맞게 구입했을 뿐, 수트나 구두 따위를 관리해야 할 필요성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라 판단하는 식이다. 서른쯤으로 보이는 나이에 구두가 저렇다면 일은 참 열심히 하는 사람이겠다. 연애결혼보다는 맞선이 어울리지 않을라나.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을 위해 우직하게 살다 가끔 열일곱의 첫사랑을 떠올리는 그런 인생. 사직서를 가슴께에 품고 다니다 술 한 잔에 찢어버리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 그런 인생.

 
상상 속 이야기가 그의 노후에까지 이르면 내릴 때가 된다. “This stop is….” 내리실 문은 오른쪽이다. 시원스레 밀려 나가는 사람들 역시 똥 같긴 마찬가지다. 개찰구를 밀고 나온다. 쾌변 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by 유민석 | 2011/01/06 01:35 | 잡소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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