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아프다
  가을이 되니까 아프다. 어깨도 결리고 무릎도 시리다. 뒷목에 담이 걸리질 않나, 편두통까지 재발해서 아스피린을 끼고 산다. 만성 비염은 호전될 기미가 안 보인다. 손발이 계속 차가운 걸 보니 혈액순환도 잘 안 된다. 머리카락도 푸석해지고 폼 클렌징 손에 집히는 걸로 아무 거나 골라다 썼더니 여드름도 다시 슬슬 올라온다. 눈도 좀 침침하다. 방이 건조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노인네처럼 쇳소리 섞인 기침만 해댄다. 아니, 그보다 아예 아침에 일어나질 못한다. 만성피로다. 담배를 끊으라고? 그건 좀 무리다.

 

  식욕이 왕성해지는 계절이 왔다. 나는 어쩐지 의욕이 사라졌다. 수업도 듣기 싫고 과제도 하기 싫고 발표준비도 하기 싫다. 책 읽는 것도 싫고 키보드 두들기는 것도 싫다. 모여서 빤하게 노는 것도 지겹고 심지어 MP3 인코딩하는 것도 귀찮다. 10년 지기한테 이런 얘기하면 왜 사냐고 빈정거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사는지 궁금해서 산다고 답한다. 아, 이런 음울하고 흉한 에너지는 다들 싫어하는데 큰일이다. 하여간 말이 살찌고 하늘은 높되, 내 머리 한 귀퉁이엔 다 식은 떡밥 같은 것들만 남았다.

 

  가을은 고독이 잘근잘근 씹히는 계절이다. 노란 은행잎 쌓인 공원 산책길 옆, 어쩐지 반으로 접힌 타블로이드판 영자신문이 놓여있는 벤치에 앉아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무 그루터기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런, 좀 병신 같지만 멋있는 남자를 위한 계절이다. 깊은 눈매와 날카로운 턱선. 나이는 30대 초반, 왠지 모르게 직업은 전문직일 것 같다. 쌍팔년도 멜로 영화에 나올 법한 그런 차도남. 배경은 뉴욕이나 파리, 아니면 런던도 괜찮겠다. 요는 능력 있고 잘생겨야 한다. 젠장, 다니엘 헤니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어라, 그런데 사실 알고 보니 배경은 서울이고 남자의 정체는 벨트 아래부터 허벅지 부분을 동그랗게 도려낸 바지를 즐겨 입는, 덜렁거리는 고환으로 영등포를 뒤흔들던 모 여고의 명물 바바리맨이었다나? 우수에 찬 눈빛으로 코트의 앞섶을 거침없이 열어 젖혔다지. 어느 날부터인가 조롱거리가 되면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괴로워 소주로 남은 생을 마쳤다는, 그런 슬픈 전설이 남았다고.

 

  독서의 계절이 또 가을 아니겠나. 술, 담배, 여자를 탐하면 뭔가 멋져 보이고 소설과 시를 읽으면 놀림 받던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의 H는 부끄러움을 몰라 야설을 탐독하곤 했다. 그의 배게 맡엔 언제나 300장 분량의 끈적한 소설이 11월 마로니에 공원의 낙엽처럼 쌓여있었다. 밤마다 한 쪽 눈으로 흘린 눈물이 바탕화면의 휴지통을 가득 채웠다고. 그와는 달리 나는 문학소년이 아니었다. 가을엔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시를 읽고도 나는 그저 뻣뻣하기만 했다.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는 시끄럽지 않겠나, 중얼거렸다. 영상매체 시대의 수혜자인 나는 시를 읽는 대신 영화를 봤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해가 바뀔수록 짧아지는 가을이지만 여전히 그 명성에 걸맞게 하늘은 높다. 하늘이 높다,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보기엔 그저 유난히 푸를 뿐이다. 헌데 하늘이 높다니.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 몰라도 참 근사한 말 아닌가. 너무도 흔하게 쓰이는 말이지만 뭔가 문학적인 냄새가 나지 않느냐, 이 말이다. 물론 가을하늘이 높은 과학적인 근거가 있겠지만 난 문과라서 모르겠다. 과학시간에 잘 안 들어서 그런 건 아니다. 믿거나 말거나.

by 유민석 | 2010/11/16 14:29 | 잡소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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