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
(전략)

  겨울이 끝날 즈음,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실눈이 살며시 내리던 입학식 날 학교 운동장에선 이사장과 교장의 비리와 관련된 인사행정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어눌한 발음으로 고리타분한 선서를 하던 신입생 대표가 올라선 구령대 옆에선 어머니들이 들고 있는 피켓들이 나란히 서있었다. [부정부패 인사행정 철회하라!][성적 조작한 전 교감이 교장직을?] 조용하지만 묵직한 학부모들과 부러 거리를 두고 서있는 교사들 사이엔 불편한 공기가 돌았다. 사돈의 팔촌을 마주한 어색함이랄까. 어른의 세계란 그리도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며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기어코 입학식이 취소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후에 영화<두사부일체>의 모티브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이 사건이 내 삶 전반에 걸친 문제의 원흉일 것이다. 작은 물꼬가 내 역사의 조류를 바꿔버렸다. 이런 제기랄. 어쨌거나 상관없었다. 그저 우리는 원숭이처럼 즐거워했다. 집에 일찍 갈 수 있었으니까. 내가 사태를 파악하게 될 때 쯤 대다수의 학부모들이 자녀의 전학을 추진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어느새 교복을 갈아입고 있었다. 남녀공학이었다. 난 또 원숭이처럼 즐거워했다. 봄이었다.

『좋겠다?』

중학교 동창들은 부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와 같은 경우를 밟게 된 몇은 어쩐지 의기양양해졌다. 기대에 부풀었다. 중학교 3년을 수컷들과의 기억으로 빼곡이 채운 열 일곱 살의 원숭이는 같은 공기를 마시는 여성의 존재에 미리부터 흥분했다. 남자는 단순하다. 어린 남자는 더욱 그렇다. 소년의 가슴이라는 건 순수한만큼 감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곧잘 주먹질을 하는 등 폭력적이고 즉흥적인 원초적 감각에 지배받곤 한다. 상처받지 않는 순간부터 혹은 아픔을 안으로 앓지 못하고 밖으로 해소하기 시작할 때부터 남자는 어른의 옷을 입는다. 아픔을 저주하는 소년은 차라리 아름다운 것이다. 때문에 소년의 아픔은 그 자체로 사랑스럽다. 안타깝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소년들은 대개 겉치레에 함몰되곤 한다. ‘쿨’한 것이 어른스럽고 남자다운 거라고 믿는다. 감성 자체로 멋스럽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싸구려 로맨스를 비웃으면서도 동시에 기대한다. 아, 그건 스물 다섯의 나이에도 다르지 않구나. 사랑이란 그렇게 시간과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니까. 어느 시인의 말처럼 누구나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싶을 테니까. 물론 그 시절엔 그걸 몰랐다. 경험과 기억이 감정을 포장하고 제어한다. 사랑하기 위해 우리가 거쳐야 할 백 한 가지의 제단, 그 곳에 경건하게 바칠 제물은 진정과 인고이다. 사실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산다는 것, 사랑받기 위해 산다는 것, 그 땐 몰랐다. 참 모르는 것도 많다. 갖은 망상과 기대를 가득히, 떨리는 발걸음으로 봄의 태양을 가득히 채운 교실에 들어섰다.

(후략)

by 유민석 | 2010/06/01 00:55 | 잡소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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