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군대에서 작업한 이야기


하는 소리와 함께 시계줄이 끊어졌다. 반쯤 갈라져 덜렁거리던 러버밴드의 마지막 남은 0.5cm가량의 이음새가 세월의 무정함과 주인의 괴벽으로 인해 그 생을 다한 것이다. 도로아미타불, 합성화학품으로 태어나 이리 쓸리고 저리 꺾이며 모진 세상 한 목숨 다해 제 할 일 다 하고 떠난 시계줄에 깊은 조의를 표하는 바이다. 내 깊은 조의와 함께 제 기능을 잃어버린 덩어리는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울지 마라. 21c는 잔인하단다. 없는 일을 찾아 유유히 표랑하려 할 때 왼손에 들린 또 다른 덩어리의 부피감이 느껴졌다. 왼쪽 팔을 잃어버린 돌고래표 몸통이다. 벽걸이 전자시계로 쓸까 하다 구질구질해 지는 게 싫어 그의 좌수左手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했다. 진실로 매몰차고 매정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아까도 말했듯이 21c는 잔인하니까.

군대의 유일무이한 장점은 복잡하지 않다는 데 있다. 정해진 시간마다 먹고 싸고 자면 그만이다. 오래된 시계줄 하나 끊어먹었다고 청천벽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라는 소리다. 사실 내 주변엔 시계가 넘쳐난다. 인간 시계들이.

“몇 시야.”
“17시 30분입니다. 저녁 때 다 됐는데 말입니다.”

아주 친절하게도 내 스케줄까지 읊어준다.

분대장님 기상입니다.
분대장님 점호입니다.
식사하러 안 가십니까?
분대장님, 분대장님, 분대장님, 분대장님, 분대장님, 분대장님…….

“알았어. 이 새끼야.”

알람처럼 울려대는 시기 적절한 언사들에 괜히 신경질이다. 폭언과 욕설이 일상화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밑의 놈 하나는 그저 멋쩍게 웃어버린다. “씹새야. 나도 좋아서 이러는 줄 아냐.”라고 마음속으로 외쳤음이 틀림없다. 내가 그랬거든.

괜히 찔려서일까. 전투모를 꼬나 쓰고 바쁜 걸음으로 나선다. 왼손을 스치는 여름 바람이 횡하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고 새삼 깨닫는다. 1년 7개월 간 벗어 놓은 적이 없는 시계다. 작대기 네 개를 이마에 박아 넣으면서 자연스레 내 손목을 떠났다. 28℃의 날씨에도 어쩐지 서늘함이 느껴져 왼손목을 살포시 감쌌다.
머리통이 뚫릴 듯한 햇살 속에서 누가 말했다.

“야, 이 날씨에 더워서 어떻게 집에 가?”

정신병자 같은 소리다. 집에만 보내준다면 사막에서 모피코트를 입으라고 해도 기꺼이 입겠다. 내일이면 민간인이 될 인간은 너는 짖어라는 표정으로 해맑게 웃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난 알 수 있다.
거칠게 얼싸 안은 후 내게 말했다.

“2년 진짜 금방 가더라. 뻥 안 치고 눈 감았다 뜨니까 전역이야.”

앞으로 포옹은 여자하고만 하겠다고 다짐하며 씩 웃어 줬다. 금방 가면 1년만 더 하지 그래? 가는 뒷모습 속에서 불현듯 시계가 생각났다. 투박하고 촌스러운 디자인, 남조선의 군대가 아니면 어떤 곳에서도 온전한 조화를 이루지 못할, 싸구려 돌고래표 내 시계. 몇 시지? 몇 월 몇 일더라?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될 걸, 쓸데없이 하늘만 쳐다본다. 해가 저 쯤이면 몇 시더라. 몇 월 몇 일이지, 오늘이? 내 군생활 얼마나 남았지? 1년 7개월 동안 나 뭐했지?

찰나를 꿈꾸는 건 누구나 매한가지다. 돌아보면 말은 쉽지. 초침을 이정표 삼아 한걸음 씩 걸으라면 누군들 넌더리가 안 나랴. 인간은 대개 절대적인 건 상대적으로, 상대적인 건 절대적으로 느끼고, 말하며, 생각하곤 한다. 요컨대 제 멋대로라는 소리다. 세상이 참으로 빌어먹어서 그렇다. 정신적 해갈이 절실한 거렁뱅이 같다. 그래서 말했잖아. 잔인하다고.
그래서…… 지금 몇 시라고?

“집합입니다.”

옳거니. 누군가에겐 끝나는 시간이 누군가에겐 시작하는 시간인게지. 내 젊음은 꽃비 내리는 향연이 아니라서 첩첩산중 속에서 자연의 풍취를 방광까지 흡입할 여유가 없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런 삽질은 좀 그만합시다. 비만 오면 도로가 걸레 되는데 3km를 걸어가면서 곡괭이질, 삽질을 얼마나 하는지 아시려나? 군대에 신이 있다면 결코 자비롭다할 수 없을지어다. 병영의 신, 병신.

10분간 휴식입니다.
10분간 휴식입니다.
10분간 휴식입니다.
10분간 휴식입니다.
10분간 휴식입니다.


인간 알람시계들은 생각보다 정확하다. 개 빠져서 말이야. 휴식이라니까 빛의 속도로 주저앉는다. 아무튼 요즘 것들. 나 이등병 땐 blah blah blah⋯⋯. 어쨌든 좀 쉬자. 삽자루를 기대고 누우니 비릿한 흙내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 흙은 필시 수백만년에 걸친 지각변동과 역사를 같이 했음이 틀림없다. 태초로부터 시간을 밟아 내 머리맡에서 인고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게다. 작은 흙 알갱이 하나에 지난 1년 7개월이 숙연해지고 만다. 그래도 흙이 욕 먹으면서 삽질할 일은 없잖아. 미래에서 돌아보면 참으로 박복하다고 푸념할 내 인생이어라. 끊어진 건 시계줄이 아닌 젊음의 줄기였노라.

시작하시랍니다.
시작하시랍니다.
시작하시랍니다.
시작하시랍니다.
시작하시랍니다.


역시 휴식은 찰나와 같다. 내 군생활이나 좀 그래봐라. 에이 썅. 허공에 대고 욕질을 했는데 소심한 놈 하나가 내 눈치를 살핀다. 미안, 알잖아. 근본없는 놈인거. 1년 7개월 간 일만 칠천 번은 넘도록 삽질을 한 것 같은데 멈출 기미가 안 보인다. 시간이 약이라고? 이만한 장기 복용도 효과가 없잖아. 모르는 게 약이야? 시간가는 줄 모르는 게 약이긴 하지. 그게 안되니 문제가 아니겠나. 아 더워. 몇 시야?!

“16시 30분입니다.”

끝날 때가 다 됐군. 30분 지나면 손 하나 까딱 안 할 거다. 담뱃불보다 지글거리는 날씨 속에서 이만하면 많이 했다. 5월이 잔인한 달이라지만 사하라같은 8월보다 더 할까. 잔인하다 못해 잔혹하기까지 한데. 하지만 간부보다 더 잔인한 건 없지.

“18시까지 하고 간다.”

역시 요즘 세대는 유행에 민감하다. 21세기의 코드는 잔인함으로 판명나는 순간이다. 시계 내다버리길 참말 잘한 것 같다.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근데 약효가 없네? 내 시간은 언제쯤 끝이 올까. 5000번의 삽질? 130번의 점호? 26번의 햄버거?

2번의 살인 충동을 느꼈지만 일단 작업은 마무리되었다. 어차피 내일 모레면 또 하게 될 테지만, 그 때 그 사람, 아니 그 삽질은 잊겠지만. 서걱거리는 발걸음에 흙뭉치가 튀어오른다. 아까 내 머리맡에 함께 누웠던 그 놈이다. 무심한 발바닥으로 땅에 비벼 주었다. 넌 니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거라. 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걸었다. 여름해가 유독 길었다. /끝
by 유민석 | 2010/02/06 22:03 | 잡소리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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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싱거운사람 at 2010/02/08 20:55
잘 읽었습니다 :)

껄껄껄 ~~~웃음이 납니다.
쩝쩝쩝 ~~~쓴웃음도 뒤이어 오는군요.

저의 돌고래표 시계는 장정으로 시작하여 훈련병을 지나 작대기 하나를 얹으니, 그 엄청난? 무게를 못이겨 두동강이 나버렸지요ㅋ 군생활의 모든것이 느껴지는 좋은 글입니다
Commented by 유민석 at 2010/02/08 23:51
정말 '애증'이라는 단어가 군대만큼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겁니다. 제대한 지 1년도 넘었는데 생각나고, 생각나면 열받고ㅋㅋㅋㅋㅋㅋㅋㅋ 중대장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가서 죽이고 싶은데 또 제대할 즈음 막내였던 놈이 지금 왕고 잡고 있다는 소리 들으면 재밌기도 하죠ㅋㅋㅋ

아 실명으로 쓰다가 중대장 보면 어떡하지ㅋㅋㅋ
Commented by 유충수 at 2014/09/26 04:19
인터넷에서 5300원짜리 돌핀 정품 시계줄 하나 사면 그만인데 버리실 것 까지야...ㅎ

군시절 생사고락을 같이 한 추억까지 버리셨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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